다큐영상: 애도의 과정 청년프로그래머 이삭
< 애도의 과정 > 들어가면서
애석하게도 나는 시간이 쌓여가면서
나의 소중한 기억과 추억들이 아프게 느껴진다.
나를 위한 누군가의 수고로움이 어렴풋이 그려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지 누군가가 하는 아픈 말들을
잘 기억해두려는 습관이 생겼다.
그러다, 누군가가 힘들어하며 손을 내뻗칠 때,
다른 누군가에게 들었던 아픈 말들 몇 개를 나누는데
희한하게도, 아픈 말들 사이에는 힘이 있음을 느낀다.
그래서 인지 나는 아픈 말들을 많이 모아두고 싶었다.
그러다 내가 아프게 될지 모르겠으나
나는 위로는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같이 아파해야 하는 것이라고
누군가에게 따끔하게 배웠다.
시간이 오래 지난 아픔에게 하는 위로는 내가 만들어낼 것이 없었다.
기억들을 천천히 나누는 애도가 필요했다.
▲ 다큐영상 '애도의 과정'
탈집중 (영화 ‘동주’로 바라본 용산공원; 애도의 과정 中 )- 동주이야기
#1- 여진, 동주가 같이 걷는 장면 (별 헤는 밤)
설계수업을 시작할 때, 가장 많이 들었던 얘기는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들은 대개 보이지 않는 것들에 의해 다루어집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은 대개 정서적인 것들입니다. 공기처럼 흐르고 있는 분위기, 오랫동안 체적 되어온 정서 같은 것들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어떤 것 보다 ‘정서, 분위기’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는 용산공원라운드테이블을 참여하면서 참 의미있다라고 여겨지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전쟁기념관이라는 장소입니다. 먹먹함이라는 정서가 가득한 장소에서 공원에 대해 논의를 한다는 점입니다. 전쟁기념관은 용산공원만이 아니라 국가공원을 논하는 장소로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복잡한 이해관계와 감정, 애도거리가 지천에 널린 우리나라, 우리 국토의 단단한 매듭을 풀어나가는 장소라 생각되었습니다. 깊은 슬픔이 깃든 장소에서 그 실마리를 풀어나간다는 점에서, 달에 한번 전쟁기념관을 가는 것이 참 좋았습니다.
슬프지만 아름다울 때 ‘먹먹하다’라는 말을 쓰곤 합니다. 이 표현은 풍경을 두고 자주 사용합니다. 용산에 대해 알아갈수록 생겨나는 저의 정서와 분위기는 바로 이 ‘먹먹한 감정’이었습니다. 대개 먹먹한 감정은 풍경 자체보다 기억이나 마음에서 비롯되는 경향이 큽니다. 저는 먹먹한 정서를 바탕으로 용산을 바라보고자 합니다. 그런 먹먹함의 과정, 애도의 과정을 잘 그려낸 이준익 감독의 영화 ‘동주’를 통해 바라보려합니다.
#2 - 애도의 정의 (검은 바탕에 애도 정의 설명)
애도: 의미있는 애정 대상을 상실한 후에 따라오는 마음의 평정을 회복하는 정신과정.
애도는 주로 사랑하던 사람의 죽음과 관련된 것으로 알려져있지만 실은 모든의미 있는 상실에 대한 정상적인 반응을 일컫습니다. 애도의 지배적인 기분은 고통스러운것이고, 이러한 기분은 외부세계에 대한 흥미의 상실, 상실한 대상에 관한 기억에의 몰두, 새로운 대상에게 투자할수 있는 정석적인 능력의 감소 등을 수반합니다. 정상적인 애도는 병리적인 것이 아니며 치료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개인은 상실에 적응하고 관계에서 즐거움을 느낄수 있는 능력을 회복하게 됩니다.
#3 -흑백의 영상과 회고의 방식 (취조장면, 몽규의 총격장면, 북간도 풍경, 밤풍경, 표정)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흑백의 영상을 전달합니다. 달리는 기차 밖 풍경도, 북간도의 고즈넉한 풍경들 모두 흑백으로 전달됩니다. 하지만 흑백의 영상이 결코 감상을 방해하지 않습니다. 인물 동주에 대해 집중하게 만들도록 돕습니다. 또한, 영화의 구성은 인물 ‘동주’의 취조장면으로부터 시작되며, 사건의 전개는 취조받는 동주의 기억으로부터 진행됩니다. 기뻤던 기억, 슬펐던 기억, 억울했던 기억, 동주의 기억들은 영화가 진행되어감에따라 차곡차곡 쌓여갑니다. 영화는 이러한 기억과 감상, 애도의 과정을 보여주는 듯 합니다. 영화는 애도의 방식으로 아름다운 풍경, 큰풍경을 주목하기보다, 인물에 주목합니다. 일제치하의 암울한 시대에서 아름답다라 말할수 있는 것, 가장 아름다운 것은 인물임을, 인물의 마음에 따라 보여지는 것이 달라진다는 것을 얘기하는듯합니다. 영화 동주는 풍경에 주목하느라 사람을 작게 여기는 실수를 하지 않습니다.
#4 - 개인적애도의 확장으로 이룬 사회적애도 (동주가 시를 쓰는 모습)
인물 동주는 시를 씁니다. 아버지의 만류와 일제탄압에도 불구하고 동주는 죽는 날까지 시를 씁니다. 윤동주의 시는 대개 부끄러움에 대한 시입니다. 자신의 이상에 못 미쳐 자조적인 성격의 시를 씁니다. 시를 쓴다는 행위는 자신을 성찰하고 반성하며, 어머니, 누이, 한글, 조국상실에 대한 애도적인 성격을 갖습니다. 일제에 대해 강력히 맞서는 사촌지간 몽규와는 다르게 동주는 소극적인 태도를 띄지만 동주는 골방에 앉아 묵묵히 감상을 적어나갑니다. 시대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의 체적은 결국 결언한 의지를 만들어냅니다. 점점 더해가는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시를 쓰는 동주는 한 청년, 개인이기보다 시대, 조국을 반영하는 인물이 되어갑니다. 개인적 애도의 확장은 사회적 애도를 이끌어냅니다. 개인적 감상을 체적시켜야 하는 이유입니다.
#4 - 애도의 과정 3단계 (참회록)
애도의 과정은 3가지 단계를 거칩니다.
1)상실과 상실의 상황을 이해하고 수용하고 대처하는 단계
2)상실한 대상에 대한 애착과 동일시를 철회(탈집중)함으로서, 적절한 애도를 수행하는 단계
3)개인의 성숙수준에 맞는 정서적 생활로 복귀하며, 흔히 새로운관계를 형성하는 단계(재집중)
#5 - 정상적인애도? (옥중 피를 토하는 장면, 동주의 마지막 취조장면, 사망 장면)
한가지 의문이 드는 것은 애도의 방식이란 결코 정상적일 수 있을까? 정상적인 애도란 존재하는 것 일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동주의 삶을 애도의 과정으로 바라볼 때, 죽음으로 결말짓는 점은 정상적인 애도가 아니었다라 생각하게 됩니다. 정상적인 애도의 과정인 탈집중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적절한 애도란 순응과 타협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도 됩니다. 하지만 조국은 상실할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점에서 동주의 애도과정에서 죽음이란 결말은 불가피한 것이며, 누구보다 상실과 상황에대한 이해, 수용이 ‘깊었다’라 생각해볼수 있습니다. 그런 깊은 애도의 과정이 담긴 윤동주의 유고시집들은 현재의 우리에게 새로운관계를 만들어내는 통로가 되곤 합니다. 애도의 과정은 죽음과 시대를 뛰어넘는 것일수 있습니다. 우리가 짐작하는것보다 더욱 거대한 과정일수 있겠다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저는 이번 청년프로그래머 활동을 하면서, 영화 동주의 회고방식의 진행과 인물 동주의 시를 쓰는 모습을 닮아가고 싶었습니다. 기억을 더듬는 영화 < 동주 >의 진행 방식은 애도의 과정 중 첫 번째 단계와 흡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현재의 상황과, 방향, 속도가 만들어지기까지를 회고함으로서, 우리는 상실에 대한 수용과 대처방법을 모색하게 되고 이를 성찰하는 계기로 삼게 됩니다. 우리의 상황이 암담하기만 한건지, 잘가고 있는것인지 물음을 던지면서 말입니다. 애도의 시작은 기억을 되 새기는것에서 시작합니다.
동주가 시를 쓰는 모습은 애도의 과정 두 번째, 세번째 단계와 흡사합니다. 시를 쓰면서 상실한 대상에 대한 애착과 동일시를 이루고 탈집중을 해내면서, 점점 대상은 각자의 삶에 맞게 자리를 잡아갑니다. 방법과 태도에 대한 고민이 이루어지고, 이를 통해 애도를 수행하게 됩니다. 애도의 결과는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데, 고민이 이어지면서 우리는 상실한 대상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가져보게 됩니다. 어떻게 풀어가야할지, 아름다울수 있을지에 대한 물음을 연이어 던지게 됩니다. 용산공원 라운드테이블에서는 거대한 애도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6 - 물음
우리는 어둡기만 한 걸까요?
우리는 잘가고 있는 걸까요?
우리는 어떻게 풀어가야할까요?
우리는 아름다울수 있을까요?
#7 - 끝
애도과정은 슬프고 괴로워 하는데서 그치지 않으며, 그과정에서 사람은 성장하기도 한다고, 나는 그 뜻을 그렇게 이해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걷는 듯 천천히’
#8 - 결언
저는 이번 용산공원 라운드테이블에 참여하면서 가장 의문이들고, 흥미로웠던 부분은 ‘참여형설계’라는 과정이었습니다. 첫 국가공원이 몇몇의 설계자가 아닌 국민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점. 소수의 설계자의 독단적인 선그리기가 아닌, 국민들의 의해 그려지는 선, 과연 그런 과정들은 어떻게 그려질 수 있을까? 궁금했습니다.
용산공원이 국민들을 만날 때, 정보전달, 설명방식보다, 감상나누기방식이 주를 이루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용산이라는 부지에 들어설 공간에만 한정될 것이 아니라, 국민모두의 감상이 합하여진 결과물, 만들어가는 과정에 집중을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답을 찾는 문제해결방식보다 감상을 나누는 시간들이 되기를 바래봅니다. 어떤 발표자료의 나열보다, 삶의 경험, 체험, 기억에 대한 감상방식이 적절할 것 같습니다. 그런 과정들은 책을 엮어가는 과정과 비슷하지 않을까란 생각입니다. 감상이모여 풍경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경험은 완성된 용산공원 보다 더 중요하며 아름다울 것이라 생각됩니다.
< 애도의 과정 > 나가면서
영상을 처음 만드는데
아는 것이 없어서, 그냥 시선이 머무는 장면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담아서 집에 오는 동안 기억나는 말과 장면들을 잊지 않으려 노력했다.
지금에서야 기억나는 말은
우니까 울어집디다.
그 계단에서 많이 죽었지.
내가 그리 살았다.
새로운 공간,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때면 나는 쉽게 얼어붙곤 한다.
더욱이 그 공간과 사람이 커보일수록
쉽게 주눅 들고, 숨기 바쁘다,
나는 함께 누리려 하기보다, 내 몸 누일 곳 찾기 바쁘고,
어떻게 하면 그 사이에서 잘 숨을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그래서 거대한 공간을 앞에 두고도
어둡고 비좁은 곳을 찾아다녔나 보다.
숨어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나 보다.
그곳에 맴도는 말들이 있을 것 같았다.
거대하고 먹먹한 곳인 이유는
울며, 죽으며, 살아온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숨어있는 것들이 분명 있었다.
거대하고 먹먹한 공간이 평범한 풍경이 되기를 바란다.